1997. 6. 『현대사상』 2, 민음사


스톡홀름 기행


김    현

서울시스템주식회사 상무이사


1.


  열흘간의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지 보름만에 또 다시 국외로 나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행선지는 스웨덴의 스톡홀름. 유럽 지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인 AKSE(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in Europe)의 제18차 컨퍼런스에서 조선왕조실록 CD-ROM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갖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95년 말에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개발하고 나서 작년에는 이 데이터베이스를 외국의 연구자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외판 CD-ROM(미국이나 유럽 지역의 컴퓨터에서도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가한 것)을 개발하였으나, 그러한 개발 내용을 외국의 학자들에게 알리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컴퓨터를 통해 보는 전자도서에 익숙치 않은 것은 우리나라나 구미 지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 CD-ROM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유인물을 통해 알리는 것만으로는 이 제품의 구매나 이용을 유도할 수가 없다. 도대체 그 CD-ROM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해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컴퓨터 프로그램은 구현 기술에 따라 그 기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제품의 내용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것의 실제적인 효용성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돈과 시간의 낭비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면서도 내 자신이 직접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기로 한 것은 전자도서의 이러한 맹점을 내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학국학과를 맡고 있는 웰라벤 교수는 작년 가을 한국에 온 길에 김용옥 교수의 소개로 내가 근무하는 회사를 찾아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AKSE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금년도 AKSE 컨퍼런스에서 실록 CD-ROM의 데모를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78년 동서 유럽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한국에 대한 공동 연구의 장을 만들고자 시작한 이 모임은 격년제로 유럽의 각국을 돌아가며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서울에서 런던을 경유하여 스톡홀름까지는 비행기 탑승 시간만 13 시간. 간간이 눈을 붙여 가며 노트에 데모 시나리오를 적어 내려갔다. 내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나 CD-ROM 데몬스트레이션은 지난 10년간 수도 없이 해 왔다. 하지만 국제학술회의에서 외국어로 정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서는 그 특별한 준비를 위한 여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노트북 컴퓨터와 프리젠테이션 뷰어를 짐보따리에 꾸려 넣는 일도 그날 새벽까지 다른 잔무를 처리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었으니까..... 요약문은 전에 만들어 보낸 것이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데모는 프로시딩을 읽는 방식으로는 진행할 수 없다. 청중의 반응을 보아 가며 설명 내용을 순발력 있게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다양한 줄거리의 시나리오를 마련해야 한다.  비행기 속에서나마 준비할 시간을 얻은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런던에서 갈아 탄 스톡홀름 행 비행기 속에서 처음으로 스웨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옆 좌석에 자리한 노신사는 웁살라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였다. 그는 뱅쿠버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황장엽 망명 사건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는 그는 대화 도중 나에게 한국의 전통사상인 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20년 가까이 유학을 공부해 왔지만, 세세한 이론이나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는 익숙해도 유학의 큰 줄거리를 한 마디로, 그것도 비전문가인 외국인에게 요약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자발적 도덕 정서를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로 파악하고, 그 정서의 사회적 확산을 통해 윤리적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사상”이라고 답하였다. 진지한 자세로 관심 있게 듣던 노교수는 자신의 E-MAIL(전자우편) 주소를 알려 주며 기회가 되면 연락하자고 하였다.

  학회가 열리는 스톡홀름 시 리딩외 섬의 포레스타 호텔에는 현지 시간으로 밤 1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굳게 닫혀 있는 현관문. 한국에서 전화로 투숙 예약을 할 때 안내원이 알려 준 ‘코드 번호’의 용처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현관 문 옆에 있는 번호판에 그 코드를 입력하니 문이 열렸다. 프론트 데스크 위에는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놓여 있었고 방 열쇠는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2.


  학회의 참석자는 120여 명, 동서 유럽의 전지역에 모인 한국학 연구자들. 내 자신이 특별한 수혜를 받은 적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학술진흥재단」이 이 모임에 대해서는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구체적인 액수는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 없다면 이 정도의 모임이 열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닷새에 걸쳐 30여 편의 논문 발표. 재미있는 것은 모든 발표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점이다.  문화인류학, 종교학, 고고미술학, 사회학, 역사, 민속학, 문학, 어학 ..... 전공 분야의 상이성에 관계없이 참석자들이 모두 한 장소에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의 연구가 비록 각각의 전문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 전문성보다는 한국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 나라에 몇 사람 있을까 말까 한 한국 전문가로서 어느 한 주제에 천착하기보다는 한국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능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첫날 오후 발표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두 대의 대형 버스에 실려 스웨덴의 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한국 대사 초청 리셉션.  참석자들은 국민학생들처럼 차례로 줄지어 버스에 올라탔는데, 한국인 여성 한 사람이 차 안에서 목소리를 돋우어 성토성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런던 대학에서 한국 미술을 강의하는 박영숙 교수. 한국에 관심을 둔 각국의 연구자들이 이만큼 모인 자리면 대사가 와서 인사말을 하는 것이 낮지, 관광 여행단 몰 듯이 하는 것은 무슨 예의인지 모르겠다고 ....  리셉션 장에서 다시 마주친 그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나를 찾았었다고 했다. 내일 오후 내 발표의 사회를 맡게 되었는데, 도대체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토론을 어떤 식으로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프로그램에 나의 발표 순서가 들어 있는 것조차 그는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하기야, AKSE 회의는 국제회의라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빤히 아는, 전 유럽을 통틀어 몇 사람 안되는 한국 연구자들의 사교성 모임이다. 전공이 다양하다고는 하나 한국이라는 협소한 바운더리 때문에 폐쇄적인 성격일 수밖에 없는 이 모임에 난데없이 컴퓨터 회사 직원이 참석하여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설명한다고 하니 그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내 발표를 주재하는 것에 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는 그를 보면서 나도 사실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은 아니다. 국내의 한 학술대회에서는 한국고전적의 전산화에 대한 발표를 했지만 사회자로부터 단 한 마디의 멘트도 얻지 못했고 플로어로부터 질문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국내의 원로급 조선시대사 연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조선왕조실록 CD-ROM 설명회를 가지려다가 몇 몇 교수들이 보인 컴퓨터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의사 때문에 설명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장비를 철수시켜야 한 적도 있었다. 벽을 깨는 것은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며 또 항상 환영받는 일도 아니다. 박영숙 교수에게는 내일 발표 전 휴식 시간에 내 이력과 발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주겠다고 하였다.


3.


  한국학 데이터베이스 데몬스트레이션 일정이 오후 마지막 순서로 잡혀 있는 둘째 날 아침. 오전 발표장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스템을 점검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CD-ROM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경고 메시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여분으로 준비해 간 다른 CD-ROM을 넣어 보기도 하고 KEY LOCK을 바꿔 보기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운영 프로그램을 점검해 보니 CD-ROM을 구동시키는 드라이브 소프트웨어가 아예 동작을 않고 있었다. 문제는 어제 밤 마우스 드라이버를 변경시킨 데 있는 듯했다. 노트 북 컴퓨터에 장착된 터치 패널 방식의 포인터는 양손을 모두 사용하여 동작시켜야 하기 때문에 데모 시에는 쓰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한 손으로 동작시킬 수 있는 외장 마우스를 접속시키고 드라이버를 변경시켰는데, 시스템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들끼리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낭패였다. 나는 몇 가지 백업 프로그램들을 비상 복구용 CD-ROM에 담아 왔지만 CD-ROM 드라이브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니 무용지물이었다.  오전 발표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스템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사실만이 더 명확히 확인될 뿐이었다. 한글 윈도 95 부팅 디스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 최악의 경우 하드디스크를 포매팅하고 운영체제를 다시 복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부팅 디스크가 없이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하드웨어 설정 정보를 일일이 수동으로 변경하며 수 차례 시스템을 새로 구동시켰다. 2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다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할 경우 시스템이 복구될 가능성도 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 가능성도 있다. 한 가지 가능성만 좇다가 실패하면 오후의 데몬스트레이션은 말짱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출장비가 아까울 것이다. 숙식비는 초청자 부담으로 면제를 받았지만 항공료와 잡비는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다. 100 명도 넘는 외국인 학자들에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와 데이터베이스 개발 기술을 홍보할 기회를 잃는 것은 더욱 아까운 일이다.  발표회장으로 내려가 대회 조직위원장인 스톡홀름 대학의 스테판 로젠 교수를 찾았다. 스톡홀름 대학에 CD 드라이브를 장착한 IBM PC  호환 기종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당황해 하면서 자기 대학에서는 매킨토시 기종만을 쓴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호텔 측에 문의하였다. IBM PC는 여러 대 있었지만 CD 드라이브는 없었다. 나는 노트북 PC를 가방에 처넣고 리딩외 섬의 상가 지역으로 달려나갔다. 컴퓨터를 파는 가게를 찾아 간 것이다. 외장형 CD 드라이브를 구할 수 있으면 그것을 붙여 볼 작정이었다. 가게 종업원은 그런 기계는 스톡홀름 중심가에 가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호텔로 돌아와 보니 로젠 교수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스톡홀름 대학의 한국학과 대학원생 두세 명이 근심스런 얼굴로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교포 여학생은 자기 동생의 컴퓨터가 IBM PC인 것 같다고 했다. 우연히 학술 대회장에 들렸다가 학생들에게 붙잡혀 나를 기다리던 한국어 강사 부부는 차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스톡홀름 시내를 가로질러 학생의 집으로 향했다.

  스웨덴의 한인 교포는 수적으로는 극소한 편. 대부분 60-70년대에 취업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왔다가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그 사람들의 2 세가 결혼할 나이의 청년들이 되었다. 그 집 식구들은 갑자기 찾아와 컴퓨터를 빌려 가겠다는 초면의 나에게 그래도 고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자세한 사정도 듣지 않은 채 아들의 보물 단지를 내 주었다. 발표장으로 돌아와 빌려 온 컴퓨터를 점검했다. 이런! 컴퓨터의 기능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영상 출력 단자의 모양이 국내 컴퓨터 것과 달랐다. 화면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화상 뷰어를 접속할 수 없는 것이다. 14인치 모니터 앞에 100여 명을 모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호텔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 컴퓨터를 다시 꺼내 들었다. 남은 시간은 25분. 어쨌든 백업 장비 한 대는 마련한 셈이니 모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충돌을 일으킬 만한 다른 디바이스 드라이버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고 제어기의 주소를 인위적으로 변경하였다. 시스템 재시동. 됐다!

  청바지와 점퍼를 벗어 던지고 아내가 넣어 준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노트북의 전원을 끄지 않은 채 (껐다 키면 안 켜질까 봐) 양손으로 받쳐들고 발표장으로 내려 왔다. 커피 브레이크 타임이 막 끝나려는 참이었다. 로젠 교수와 웰라벤 교수, 옥스포드의 루이스 교수 등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반겼다. “어떻게 됐읍니까?” “이제는 문제가 없읍니다.” 차를 운전해 주었던 윤상호씨가 옆으로 다가와서 한 마디 했다. “김 선생님이 혹시 비관해서 창밖으로 투신하지 않았나 걱정했지요.”


4.


  박영숙 교수에게는 내 발표에 대한 사전 정보를 줄 여유가 없었다. 루이스 교수가 대신 사회를 보기로 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실록 CD-ROM도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발표에 앞서 나와 나의 일에 대해 청중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자세하고 친절한 소개를 해 주었다. 나의 이번 발표는 딱딱한 논문 발표가 아니니 편안하게 즐기는 시간으로 여겨 달라는 주문으로 데모를 시작하였다. 청중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실록 CD-ROM의 데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발표는 풀 텍스트 검색 예제를 보이는 순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정도전의 관한 211 건의 실록 기사를 1초도 안되는 시간에 찾아내는 것을 보고 참석자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그 다음은 국내에서는 이미 유명해진 코끼리 이야기.

  검색 명령을 통해 조선 전기 실록에 실린 17건의 기사를 한 순간에 찾아낸 후, 기사 하나 하나를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여 주며 우리나라 최초의 코끼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시대 태종 11년(1411), 일본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바친 일. 그 코끼리가 자기를 희롱하던 관리를 밟아 죽게 한 후 남해의 섬으로 귀양가게 된 이야기. 그리고 사면을 받은 후 남도의 여러 고을을 전전하다가 다시 섬으로 보내져 생애를 마치게 된 기록들 ....  우리보다는 훨씬 웃음에 헤픈 서양인들은 마냥 재미있어 하며 유쾌하게 웃어댔다. 코끼리의 일생을 이야기 한 후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재미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한 마리의 코끼리에 대한 것이지만, 그 기사들은 실록 안에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첫 기사와 마지막 기사 사이의 시차는 11년에 달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실록 기사를 순차적으로 읽어 가며 이 기록들을 찾으려 했다면, 적어도 8천 건의 개별 기사를 읽어야 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기사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읍니다만, 그것들은 실록의 여러곳에 흩어져 있고 기사들간의 시차가 크기 때문에 연관된 기사를 모아 그 줄거리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검색 기능은 그 유관 기사들을 함께 모아 줌으로써 상호 관계가 드러나게 하며, 하나의 줄거리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료를 데이터베이스화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용성입니다.”

  원래 이번 발표에서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메뉴였다. 그러나 AKSE 회의의 참석자들은 국내 역사학자들처럼 조선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세한 역사 사실을 찾아서 보이는 것은 적절치 못할 듯했다. 참석자들은 실록이라는 역사서 속에 담긴 다양한 내용에 경탄했고 그 이용도를 높이는 컴퓨터의 기능에 탄복했다. 그 정도면 이번 데모의 목적은 성취한 셈이다.

  실록 CD-ROM을 보인 후에는 현재 진행 중인 다른 한국학 데이터베이스 간행 사업을 소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진행 중인 한문 원전 실록 데이터베이스 편찬 사업, 정신문화연구원의 이성무 교수와 진행 중인 사마방목, 잡과방목 CD-ROM 간행 사업, 하버드의 와그너 교수, 원광대 송준호 교수를 도와 진행하고 있는 문과 방목 데이타베이스 편찬 사업 등.....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한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기를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발표를 끝맺었다. 마치 연극의 막이 내린 후 커튼 콜을 요청하는 것처럼 참석자들의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열띤 질문들....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시겠읍니다만, 시간 관계상 여기에서 발표를 마치겠읍니다.” 루이스 교수가 나를 긴장된 자리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다시 한 번 박수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전날 인사를 나눈 몇몇 젊은 연구자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웃음띤 시선을 보냈다. 독립신문과 주시경의 언문일치 운동에 대한 발표를 위해 참석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가 만면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치하하였다. “참 훌륭한 발표였어요. 어쩌면 영어를 그렇게 잘 하지요?”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국내에서 영어를 배운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독해와 작문에나 익숙할까. 다만 이러한 종류의 데몬스트레이션에는 이력이 났기 때문에 이번 외국 공연(?)도 비교적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5.


  AKSE 회의는 다섯 번째 날의 멤버십 미팅을 마지막 순서로 끝을 맺었다. 19차 회의는 1999년에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열기로 하였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의 장윤식 교수가 태평양 지역 국가의 한국학회(PACKS)에 관해 소개하고 AKSE와의 유대를 희망하였다. 그는 나에게 PACKS 학회에서도 한국학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소개를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영 도서관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인 배쓰 매킬롭 여사는 올 여름 영국 대영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한국 미술 전시회를 소개하며, AKSE 회원들의 참여를 당부하였다.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참석자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어렵게 와서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는가고 물으니 자기들은 바보라서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직장을 떠날 때는 좋지만 막상 떠나 있으면 죄스런 마음이 들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바보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순항 항공편의 정해진 스케줄 때문에 그 다음날 출발하게 되었을 뿐, 여행을 즐길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다. 적어도 하루 저녁은 이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리딩외 섬의 해안 역에서 도심으로 가는 전차를 기다리는데 백조 두 마리가 바로 옆 물가에서 노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여겨지기보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다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서울의 혼잡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혼자서 ‘감라스탄’이라고 하는 구시가의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피리 소리의 선율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두 평이나 됨직한 조그마한 가게 안에서 30대 중반의 남자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오카리나의 일종임은 알 수 있었으나 모양이 좀 이상하다. 망설이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악기지요?” “오카리나 알렉사.” 알렉사는 그의 이름이었고,  그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루마니아 태생. 전직은 전기 기사. 5년 전 스웨덴에 정착하였는데 그때 러시아에서 온 악기 제조공을 만나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 러시아인으로부터 오카리나 제조법을 배웠고 거기에 자신의 창의력을 더하여 그 이상한 모양의 악기들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공룡, 거북이, 까마귀 ....  그의 악기는 모두 이런 동물 모양이었다. 외형만 보면 훌륭한 장식용 도자기들이다. 그러나 주둥이로 숨을 들여보내며 등 위에 뚫린 구멍을 여닫으면 악기 연주가 되는 것이다. 그는 벽면에 늘어선 크고 작은 동물 하나 하나를 들어 보이며, 음색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어떻게 음색을 차이 나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에 몇 개나 파느냐는 질문에는 자신의 인생 목표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에게서 음역이 다른 까마귀 두 마리를 샀다. 그는 자기가 만들고 나서 가장 흡족해 했던 것들이라고 하면서 투박한 포장지로 그것들을 정성스레 싸고 또 싸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남은 시간에는 근처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 ‘오페란’에서 ‘라보엠’을 관람하였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그 나라 예술 전통의 유서 깊음이 물씬 풍겨 나오는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무대의 1/4쯤은 안보이는 발코니 좌석에서 무대보다는 다른 관람객들의 표정을 구경하며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나의 옆 좌석에는 나처럼 혼자서 온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막간에 이 오페라 하우스의 역사에 대해 물으니 200년 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에 의해 지어졌는데, 오페라 광이었던 그는 결국 이 극장 안에서 암살당했다고 했다. 그는 이 건물의 건너편에는 똑같은 모양의 작은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현재 외무부 청사로 쓰이고 있으며 자신은 그곳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무대 장치도, 가수들의 노래도 좋았다. 그 공무원처럼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가깝게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다만 푸치니의 라보엠은 왜소한 빠리 소시민의 애환을 그린 오페라인데, 출연자들의 몸집이 극중 이미지에 비해 너무 컸고,  특히 여주인공 미미는 병약해서 죽는 차가운 손의 여인치고는 너무 뚱뚱했다. 스칸디나비안들은 유럽인들 중에서 유난히 키가 크다. 저녁 때 들어간 레스트랑의 화장실은 남자 소변기의 높이가 너무 높아 소변보기가 불편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평균 신장을 짐작할 만하다.  같은 유럽의 나라면서도 스웨덴인에 의한 프랑스 오페라 공연이 썩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은 것은 예술과 민족의 연결 고리가 그만큼 강한 것이기 때문일까?

  일주일이 채 안되는 짧은 체류였지만 스톡홀름은 여러가지로 깊은 인상을 남게 하는 도시였다. 정결함, 옛스러움, 여유로움 ..... 그러한 가운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더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그냥 현재 그대로. 더 편해질 필요도, 더 풍요로와질 필요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 하지만 이 말은 그 사회에서는 무엇인가 미래의 목표를 추구하는 역동적인 노력이나 성취 동기가 결핍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스톡홀름 대학의 욘슨 교수는 그래서 한국 사회와 한국인이 부럽다고도 했다.


6.


  스톡홀름 기행에 꼭 덧붙여야 할 한 가지가 있다. 한국인 입양아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언론에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수잔 브링크스의 아리랑’을 기억한다. 나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스웨덴이라는 먼 나라까지 한국인 어린이가 입양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리고 이번 출장 기간 동안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스웨덴 한인 입양아의 숫자가 1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웨덴의 인구는 8백 만. 총인구의 8백 분의 1이 한국계 입양아라는 이야기다. 이 나라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나라도 아니다.  앞으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질지도 모른다.  ‘수잔 브링크스의 아리랑’이 파문을 불러일으킨 이후 한국 정부에서는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해외 입양을 금지시킨다고 했지만, 그것이 현실성 없는 조치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정부의 제재력이나 언론의 호소력보다도 몇 백 배 더 강한 전통적 사고의 굴레가 국내 입양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운다고 하는 것은 서구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조선시대 오백여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사회 윤리 의식의 저변에는 혈연 공동체인 가족이 국가․사회의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고 하는 사고가 자리해 왔다. 이것은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개개인이 삶의 문제는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나 노인에 대한 사회 복지 시책이 형편없는 지경인 것은 혈연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강한 가족 윤리 덕택에 국가가 그 책임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사회에서 자식은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앞서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면서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집 장만해 주고, 여유 생길 때까지 생활비 대 주어야 하는 식구이며, 아저씨 형님 기타 등등의 집안 어른들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정서 속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기회가 닿는대로 끌어 주고, 키워 주어야 할 인척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인 혈족의 연대 속에 ‘근본이 없는 아이’가 들어올 수 있는 여지는 너무도 협소하다. 유교적 윤리 덕목의 기반이 되는 ‘인’(仁)은 사실상 ‘혈연에 대한 연민의 정서’이지 인간 일반에 대한 박애의 정신이 아니다. 혈연간의 무한 의존을 전제로 하는 ‘효’(孝)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윤리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는 한, 기독교적인 박애주의를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양자가 자연스럽게 조화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입양의 문제가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윤리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며,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뿌리가 다른 윤리 덕목과의 조화가 끈질기게 탐구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구적인 지성들이 그 대안이 될 만한 윤리설을 정립하고 꾸준히 사회 운동을 벌여 나아간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 사회 일반에 파급되기까지는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한국 어린이의 해외 입양 문제가 짧은 시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면, 그것의 근본적인 해결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관련된 다른 문제를 먼저 풀어 갈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스웨덴 인구의 1/800은 입양아 출신 한국계 스웨덴인이다. 한국인의 얼굴을 가진 채 스웨덴 사람이 되어 버린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고민에 동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의 부모들이 왜 자식 양육을 포기했는지는 그들이 혹시나 친부모를 찾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묻고 개인적으로 이해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왜 그들을 해외로 보냈는지,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떠한 나라인지는 우리 사회가 대답해 주어야 할 물음이다. 변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고민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 한국인들의 가치관은 서구인들의 잣대로 재어 볼 때 부정적인 요소가 많을지 몰라도 그것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우리의 엄연한 실상이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 주게 되면 최소한 불필요한 오해는 막을 수 있다.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다. 미국 사회의 한․흑 갈등,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우․톰슨 사건, 한미 무역 마찰 .... 한국인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서구인들의 그것과 다르지만, 나름대로 윤리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노력이 선행되었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좀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일이다.

  스웨덴의 코리안 스웨디시들이 어떠한 식으로든 그들이 태어났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그 관심은 자칫 오해와 증오로 귀결될지도 모를 위태로운 관심일 수도 있다. 나는 스톡홀름 대학의 한국학과가 그들에게 한국 문화의 성격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지원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정도의 한국말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정서와 도덕 관념의 특질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심도 깊은 교과 과정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술진흥재단」에서는 현재 스톡홀름 대학에 대해 3년의 기한으로 교수 요원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 대학 교수들 중에는 이 기관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이분들이 우선 스톡홀름 대학의 한국학과 지원 사업의 당위성을 인정해 주고 그 학과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후속 사업에 대한 여론을 모아 준다면 긍정적인 결과가 얻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


  편집자는 이 지면을 나 자신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프리젠테이션.’ 나에게는 사실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에 종사하다 보니 그 내용을 소개하는 프리젠테이션은 내 일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연구 개발 용역을 따내기 위한 ‘제안 설명회’, 개발 성과를 보고하기 위한 ‘결과 보고회’, 기획 상품의 홍보를 위한 ‘상품 설명회’ .... 소프트웨어나 데이터베이스의 개발이라고 하는 것은 시설과 인력의 투입을 수반하는 것이고, 그에 필요한 비용을 누군가로부터 조달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업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납득시켜 사업으로 성사시키는 것은 내 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프리젠테이션은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계획, 내가 만들고자 하는 상품에 관한 것이었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라니? 이 점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낯설기 짝이 없다.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나는 항상 그것들을 시작이라고 간주했고 그것이 어떠한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에 대한 평가는 한참 후에나 있을 일로 여겨 왔다. 그리고 마치 내가 무슨 보여 줄 만한 것이라도 있는 양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그때 가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번 인터뷰의 요청이 왔을 때, 나는 그것의 성격을 무언가 흔치 않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탐방이라고 생각했었다. 신문 잡지, 그리고 TV에 매일 매일 넘쳐 나는 그러한 종류의 탐방에는 이미 여러 차례 응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보도 기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상품으로 만들어진 내 일의 결과물은 적극적으로 그것을 홍보하여 판매를 촉진해야 했다. 설사 상품 판매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속한 회사의 이름을 소개하여 그것의 사회적 지명도를 높이는 일은 나와 내 직원들이 급료를 주는 회사에 대해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편집자는 인터뷰 과정에서 이 잡지에서의 기획 의도는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다른 것임을 강조했고, 그 결과 나로 하여금 적지 않은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일과 그 일의 밑바닥에 깔린 나의 생각을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한 지성인의 삶의 모습으로 윤색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나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면 그런 연출도 한 번 해 볼 만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럴 준비가 안돼 있었다. 언젠가 나의 생각이 좀 더 충분히 무르익고 나의 일이 실험의 단계를 지나 결실을 맺게 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시도도 해 볼 수 있으리라. 인터뷰 직후 나는 출장을 떠나야 했고 돌아오자마자 편집자에게 약속한 이 글을 써야 했다.  앞에 적은 내용은 가장 가까운 요 며칠 동안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해외 출장이 아니라도 요즈음 내 생활의 모습은 거의 그런 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글도 편집자가 요구한 ‘나 자신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